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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 (121)] 조각가 박성태…동양적 조형언어로 생명의 실상과 의미를 추구

조각가 박성태는 1960년 전남 광주시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해 동양화를 공부하고 이어 같은 대학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2010년 9월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 현재는 뉴저지주 리지우드에 살면서 미국과 한국 등을 오가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박성태는 한국에서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화단에 나서 작가 활동을 했다. 1993년 토 아트스페이스에서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한국과 중국, 미국 등에서 14차례 개인전을 가졌고 수십회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대표적인 그룹전으로는 1990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젊은 모색'90-한국화의 새로운 모색전’, 1997년과 2000년에 개최된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2003년 서울시립미술관의 ‘유쾌한 공작소전’, 2010년 부산비엔날레 등이다. 1993년년과 1994년에 MBC미술대전 우수상을 수상했고 현재 그의 작품들은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시립미술관, 서울대학교 박물관, 수원 월드컵 경기장, 제주도 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박성태는 어린 시절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어쩌면 그러한 자유 속에서 장래 미술가로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것으로 보인다. “나는 9남매중의 막내로 태어난 관계로 공부하고는 담 쌓고 지냈다. 공부보다는 들로 산으로 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심심하면 그림 그리고, 만들고. 자유분방하게 방목과 같은 환경에서 자란 관계로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국어책 읽기가 옹색하고 싫었다.” 박성태가 본격적으로 미술에 눈을 뜬 것은 청소년 시기다. 고교 시절 광주에 있는 로뎅화실을 찾게 됐고 여기서 수채화가 강연균 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미술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박성태는 그림을 시작하면서 모딜리아니를 좋아하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고 말했다.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서울대 미대에 들어가서도 이어졌다. 박성태는 서울대 미대 회화과의 입시요강에 맞춰 수채화와 소묘 등을 공부했으나 2학년 때 동양화과를 선택하게 된다. 중학교 2학년때부터 유화를 접했으나 입시준비 중 수채화의 명도와 채도 문제로 갈팡지팡 하면서 어려움을 겪은 것이 원인. 여기에 동양화는 그림이 아니라는 선입견까지 있었으나 2학년 동양화 첫 수업에서 이 같은 생각은 여지 없이 깨지고 결국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도 동양화를 전공하게 됐다. 그렇다고 박성태가 전통적인 동양화의 표현과 작품 제작방법을 그대로 받아 들인 것은 아니다. 그는 “대학원 수업 중에 노가리 작품 시리즈로 3차원 표현 기법을 이용해 설치와 입체작업들을 하면서 보수적인 선생님들과의 전쟁이 시작되고 갈등이 이어지면서 동양화과를 선택한 것을 가끔 후회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작가로서 작품활동을 하면서 동양화를 배우는 과정에서 얻은 동양사상을 기반으로 한 표현 방법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미국으로 오기 전인 2007년 중국 북경으로 건너 가 작품활동을 했다. 한국과 중국으로 오가면서 활동을 했는데 당시 거주하던 창핑이라는 행정구역은 명나라 황제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 근처에 황후의 능이 있는 작은 산간 마을이었는데 이곳에서 외부와 일정 수준 단절된 채, 나 스스로의 작품세계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당시 그곳에서 작품을 할 수 있었던 것이 현재까지 작품에 몰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 것으로 생각된다.” 박성태의 작품은 이러한 삶의 과정을 통해 구축된 동양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생명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 중에는 인물과 말 등을 3차원 조형언어로 표현한 조각작품이 많다. 그는 이러한 인물과 동물 등의 작품을 천과 알루미늄 등의 다양한 재료로 만든다. 인물들이 집단으로 모여 있는 군상도 있고, 인체의 일부를 단절시켜 표현한 작품, 또 말이 생동감 있게 뛰는 2차원 릴리프 부조 스타일의 작품도 있다. 그의 이러한 작품세계는 크게 두 단계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작품활동을 시작하던 초기, 사회적인 상황을 작품에 끌어들인 단계다. “당시 내가 작품을 하게 된 동기는 사회적인 현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물론 이는 현재의 작업에도 깊이 내재될 수 밖에 없는 외적 동기다. 나는 대학 1학년때 광주민주화운동을 현장에서 경험하면서 죽음과 생명, 존재, 잔상 등 어쩌면 무지개 같은 생명현상에 관심을 가졌다.” 박성태의 이러한 작가의 신념은 1988년 테라코타 작품들을 발표한 일민미술관 초대전에 잘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이 전시를 거치면서 학창시절부터 부딪히고 고민하던 사회문제에 대해 매듭을 짓는다. 그리고 박성태는 다시 새로운 항해를 시작한다. 그것은 바로 생명에 관한 문제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생명의 의미와 가치를 담기 위해, 이에 합당한 형식을 갖추기 위해, 이 산과 저 산, 들과 강으로 다녔다. 이런 과정에서 한지를 사용한 입체 설치, 섭씨 800도 정도의 온도에서 구워내는 동류화(일종의 칠보기법), 테라코타 설치작업 등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박성태는 재료를 다루는 문제에서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다. 너무 무겁고 힘에 겨운 노동의 강도 때문에 가벼움에 대한 소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작품은 뉴욕에 오면서 새로운 모습을 바뀌고 있다. 알루미늄 망사로 기초 형상을 제작하고 다시 굳히는 작업, 그리고 천을 사용해 무엇인가 모양이 있는 형상을 만드는 작품으로 변화하고 있다. 박성태는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이전의 망사 작업에서 보여지는 그림자보다, 더욱 표피적인 껍질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것들이다”라고 설명한다. 박성태는 이러한 자신이 작품들의 밑바탕에 깔린 예술적 신념을 이렇게 풀어서 설명한다. “형식적인 파괴와 일탈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의 작업들에는 동양적인 사고와 질료에 대한 해석이 있었다. 현재의 망사작업에 나타나는 기본적인 구조, 즉 방점 같은 사각 틀을 구성하는 수직과 수평선은 동양의 음과 양을 상징하는 씨줄이자 날줄로 해석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시인 김지하의 생명사상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숙성시켰다. 나는 작품을 통해 생명에 대한 나의 생각을 여과 없이 보여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 박종원 기자 jwpark88@koreadaily.com

2011-04-04

[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 (120)] 조각가 장은진…십장생의 정신세계·미감을 3차원 조각언어로 구현

장은진은 30대 여류 조각가로 대구에서 태어나 성신여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와 보스톤대 석사, 뉴욕대에서 예술행정 과정을 이수했다. 그 동안 6차례의 개인전을 가졌고, 현재는 뉴욕과 보스턴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오는 5월 보스턴에 있는 포트포인트 아트갤러리에서 7회 개인전을 가질 예정이다. 장은진은 어린 시절 음악과 가까웠다. 미술을 하기 전 음악의 세계를 먼저 접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익혔고, 서울시립교향악단과 2차례 협연을 하는 등 장래 전문 음악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때 주위의 조언으로 미술을 시작했다. 장은진은 “당시 2년간 음악과 미술을 병행했는데 왠지 모르게 자연스럽게 미술에 끌리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글 쓰고 그림 그리는 먹의 향기, 곧 묵향을 너무 좋아했다. 또 큰 산수화나 동양화의 그림을 보면 눈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었던 경험도 있다. 그렇다고 미술과 음악을 구별하고 우열을 나누자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미술을 업으로 하는 조각가지만 나의 예술세계에는 미술과 음악이 서로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은진은 이러한 한국 전통 문화에 대한 감성은 그의 대표작 시리즈인 십장생 (十長生) 조각에 온전히 나타난다. 십장생은 본래 한국의 민간신앙이나 도교에서 나오는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10가지 사물이다. 말하자면 거북(龜)·사슴(鹿)·학(鶴)·소나무(松)·대나무(竹)·불로초(不老草)·산(山)·내(川)·해(日)·달(月)을 말한다. 그러나 십장생은 한국인의 다양한 생활과 문화, 정신세계의 반영이기 때문에 십장생의 구체적인 항목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약간씩 달라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십장생으로 해·돌(石)·물(水)·구름(雲)·소나무·대나무·거북·학·산·불로초를 꼽기도 한다. 10가지 항목에서 다소 차이는 있지만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예를 들어 거북과 학은 가장 오래 사는 동물로 알려져 있기에 장수를 상징하고, 소나무는 사계절 늘 푸르른 기상을 유지하고, 대나무는 휘지 않고 강한 기상을 상징한다. 모두 오랜 세월을 견디고 장수를 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십장생은 한국인의 자연관과 인생관, 세계관을 대표하는 것으로 문화와 예술, 신앙은 물론 일상 생활의 도구와 장식 등에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장은진은 이러한 십장생, 곧 십장생 그림 등에서 영감을 받아 이를 조각으로 만든다. 그는 이렇게 자신이 십장생 조각을 만들게 된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에게 종교만큼이나 강한 것이 희망이다. 아프지 않고 오래 살고 싶은 욕망, 십장생도는 바로 그것이 표현된 것이다. 나는 살아 오면서 아름다운 공예품도 보았고, 수 많은 자료와 그림도 보았다. 그러나 십장생을 주제로 한 조각은 보기 어려웠다. 나는 서서히 욕심이 나기 시작했고, 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스케치를 하게 됐고 이를 바탕으로 나만의 십장생 조각 분야를 개척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지난 17년 동안 십장생을 기반으로 하는 조각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장은진이 그 동안 추구한 십장생 조각들은 브론즈(황동)와 철, 나무, 돌 등을 재료로 해서 산과 물, 나무와 구름, 동물 등을 3차원 조각언어로 풀어낸 작품들이다. 그의 작품 중에는 우주와 시간의 순환을 상징하는 둥근 원형의 브론즈 표면에 십장생 무늬를 새겨 넣거나, 또는 브론즈로 원형 통 모양을 만든 뒤 이 위에 구름과 산 등의 십장생 무늬를 그리고 한편으로 소나무 가지가 이 원형 통 바깥으로 뻣어 나오면서 학이 그 소나무 가지 위에 올라 가 있는 것도 있다. 그의 이러한 십장생 조각은 브론즈와 나무 등의 재질이 주는 친밀감과 함께 그 위에 그려지거나 새겨진 십장생 형태와 무늬의 전통적인 미감으로 인해 장식적이면 한편으로 명상적인 느낌을 준다. 장은진은 이 같은 십장생 조각과 함께 최근에는 나무와 천을 이용한 설치 조각작품도 만들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의 기본적인 주제는 자신의 영혼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을 끄집어 내 이것을 3차원 공간에 자유롭게 펼쳐내는 것이다. 십장생 조각에서 한 발 더 나간 그의 최근 작품들에는 배의 돛에서 느껴지는 듯한 부드러움과 강함이 함께 표현돼 있다. 장은진은 자신의 이러한 모든 작품들이 깊은 고뇌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행복할 때 만들어지는 예술은 풍부하며 아름답다. 그러나 고뇌로 이뤄진 예술은 깊다. 슬프도록 아픈 고뇌는 삶과 영혼을 단련한다. 작가는 돌처럼 깎이고 쓸리지만 그 속에서 형태를 잃은 영혼을 찾아내 세상 밖으로 끌어 올린다. 최근에 만든 ‘내 영혼의 부분(The Part of My Soul)’ 작품은 여러 개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는 완전히 하나를 이루지 못한 영혼을 표현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미완성처럼 보이는 단편적인 작품 하나하나를 모아 큰 작품을 완성함으로써 완벽한 하나의 영혼을 구축하려 한다.” 장은진은 이러한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다고 말한다. 십장생 조각 또는 최근의 영혼의 깊은 부분을 드러내는 작품을 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러한 작품활동은 이해가 전제가 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러한 이해를 통해야만 예술이 인간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장은진은 작품 활동을 하면서 이러한 자신의 믿음이 언젠가는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밝혔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한정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을 허물고 싶다. 예술의 영역은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것이다. 예술은 생활이며, 이상이며, 꿈이다. 예술은 상상력의 날개다. 무한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예술은 보다 더 넓어진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로 통합돼 예술이 인간을 이해시키며 감동시키는 날이 언젠간 오리라 믿는다. 나는 무모한 도전이지만 끝없는 노력으로 예술이 반드시 큰 감동으로 우리에게 돌아오게 하는데 작은 힘을 보태고 싶다.” 박종원 기자 jwpark88@koreadaily.com

2011-03-28

[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 (119)] 화가 김봉중…색과 형태로 인생·자연의 덧없는 흔적을 그린다

김봉중은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 와 현재 뉴저지주 듀몬트에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 동안 10차례 가까운 그룹전에 참가했고, 오는 4월 뉴저지주 해켄색에 있는 리버사이드갤러리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가질 예정이다. 김씨가 미술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어려운 생활과 만화다. 이러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김봉중은 “그 당시 나만 그러한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닌 것 같아 지나온 삶을 밝힌다는 것이 매우 부끄럽고 조심스럽기만 하다”고 어려워했다. 그러나 그의 지나 온 인생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작품뿐 아니라 그의 인생 자체가 예술이라고 느낄 만큼 감동을 줬다. (실제로 한국에서 작가와 비슷한 연령층이 어렸을 때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여년이 지난 시대로 실제로 상당수가 가난했다) 그의 예술과 인생의 시작은 가난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시작한다. 김봉중은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이렇게 말한다. “초등학교 5학년때 아버님께서 오랜 병환 끝에 세상을 떠나신 후 삶이 정말 저 밑바닥까지 내려갔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5학년때까지 지금의 한남동에서 살았다. 다른 곳으로 떠나기 전 동네가 철거되고 각종 쓰레기가 쌓여 천막을 치고 살았다. 나는 그때 매립용으로 버려진 쓰레기 더미 속에서 전깃줄이나 그밖에 고철들을 모았다. 이것을 고철가게에 같다 주고 몇 십원을 받아서 만화가게로 달려가곤 했다. 나는 그 때 만화를 부지런히 보고 그렸는데 그러면서 그림에 눈을 뜨지 않았나 생각한다.” 한편으로 김봉중은 “초등학교 다닐 때 장충당 공원에 갔을 때 그곳에서 할아버지들이 죽 앉아계신 모습을 보면서 내가 할아버지가 됐을 때 그림을 그리면 지루하지는 앉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가졌다고 한다. 당시에 이미 그림에 대한 정열이나 잠재력이 있었음인지 그는 하얀 종이와 샤프 펜슬만 있으면 너무 기분이 좋았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김봉중은 중학교에 가서는 그림 외에 다른 공부들은 너무 지루했다. 그저 미술 시간이 있는 날만 기다리곤 했다. 공부는 중학교 졸업할 때 갈만한 고등학교가 없을 정도로 거의 낙제였다. 결국 그는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형의 친구 소개로 지금의 서울 연건동에 있는 서울대 의과대학 전자현미경 실험실에 청소와 잔심부름을 하는 사환으로 취직한다. 김봉중은 그 곳에서 5년동안 지내면서 야간고등학교에 진학해 졸업하고, 2년정도 대입을 위해 재수하는 동안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경험했다. “한번은 사환으로 일 할 당시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의대 여학생이 의과대학 캠퍼스 안에 있는 미술 동아리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며칠 후 그곳 미술반 서클 학생들에게 부탁해 처음으로 미술의 기본인 석고 데생을 하게 됐다. 그리고 얼마 후 근처에 있던 화실에 들어가 그 곳에서 저의 평생의 은인이신 차일만 선생님을 뵙게 됐다. 당시 사환이 받는 급료로는 미술 레슨비에 턱없이 부족했지만 차 선생님 배려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1년간 집중적으로 데생과 수채화를 배운 후 그 해 겨울 서울대 미대에 합격을 했다. 정말 그 때 당시에는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나에겐 어제와 오늘이 너무 다른 세상이었다.” 김봉중은 어제까지는 청소부 사환이었고 오늘은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학번 8408-1108) 학생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느끼며 대학생활 4년 내내 정말 학교에서 미친 듯이 그림에 몰두했다. 거의 매일 학교 수위 아저씨가 그만 집에 가라 할 때까지 실습실에서 그림을 그릴 정도로 대학생활이 너무 기쁘고 즐거웠다. 그는 자신에게 찾아 온 삶을 그냥 놓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때 실기실에서 그림 그리는 것 외에는 미래에 대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김봉중의 인생은 급하게 바뀐다. 서울대를 졸업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초청으로 이민을 오게 됐고, 이 이후의 삶은 그야말로 다시 저 밑바닥서 시작해야 했다. 수많은 직장을 옮겨 다녔다. 어떤 때는 작은 차에 물건을 싣고 무작정 물건을 팔기 위해 각지를 누비기도 했고, 식당에서 손님 시중을 드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각박한 이민 생활 속에서도 김봉중은 그림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다. 1년에도 몇 번씩 직장을 쫓겨나고, 다시 들어가고, 옮겨 다니는 생활을 반복하면서도 그는 늘 자신의 업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해 붓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이 6일동안 하루10시간 동안 가족과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하고 있지만 저녁에는 2시간 정도씩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을 위해 집 차고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기를 벌써 세월이 21년이 흘렀다. 그러면 김봉중은 도대체 무엇을 그리는 것일까. 그의 그림에는 수많은 주제, 수많은 소재,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스스로 “어떤 한 가지를 그림을 오래 그리면 싫증이 나서 다른 스타일의 그림으로 옮겨 간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그림 상당수는 추상화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에는 인물이 있고, 얼굴이 있고, 파도 치는 바다와 하늘이 있고, 모래사장과 바람이 있다. 그가 쓴 색과 만들어낸 조형 뒤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을 살면서 느끼는 적막감이 담겨 있다. 그는 붉은색과 푸른색 물감으로 자신의 마음과 하늘과 바람을 그리고, 집 주위에서 발견된 나무 막대기를 캔버스에 올려 놔 깊은 의미를 담은 명상적인 표현으로 풀어낸다. 그의 그림은 억지로 형식적으로 분류한다면 ‘색과 형태를 기본으로 꼴라쥬(기존에 주위에 있거나 또는 만들어진 것으로 미술 재료로 사용되는 물건)를 사용하는 뜨거운 추상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김봉중은 이러한 자신의 그림, 자신만의 표현 속에 자신의 정서와 삶, 인생과 자연에 대한 관조를 담고 있다. “나의 그림은 세상의 모든 욕망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져감을 표현하고 있다. 나는 이를 위해 유화 재료와 버려진 나무조각, 철사, 신문기사 사진 등을 꼴라쥬로 사용한다. 한마디로 혼합재료를 사용한다고 보면 맞다. 나는 이러한 재료를 사용해 세상의 모든 욕망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져감을 표현한다. 나는 우리가 추구하는 삶 대부분이 사라지는 것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김봉중은 자신의 그림이 불확실성을 바탕으로 하듯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에 대해서 확고한 선을 긋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자신의 미래가 “현재의 연속 선상에서 결정될 것이라며 무엇보다 현재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영원히 꿈을 꾸는, 쉽게 잡히지 않는 무엇인가를 쫓아가는 이상주의자임을 드러낸다. “내 그림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저 지금처럼 즐겁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나의 길이라고 확신한다. 미래에 뉴욕시 맨해튼에 있는 현대미술관(MOMA)에서 개인전을 여는 환상에 취해 나만의 꿈속에 빠져보면서.” 박종원 기자 jwpark88@koreadaily.com

2011-03-21

[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 (118)] 화가 김아토…인간 실존의 문제, 감성적 추상으로 풀어낸다

화가 김아토는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여의도 근처 마포에서 성장했다. 숭문중고와 단국대 예술대학, 그리고 뉴욕으로 유학 와 프랫인스티튜트를 졸업했다. 현재는 뉴욕시 플러싱에 살면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김아토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개인전과 각종 그룹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프랫인스트티튜드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뉴욕에서 활동하면서 최근까지 3번의 개인전을 가졌고 수십회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김아토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몇 가지 큰 기둥이 있다. 하나는 학창시절 김아토를 포함해 학생들을 헌신적으로 가르쳤던 스승들이다. 또 하나는 그가 살아 오면서 체험한 한국의 정치·사회·문화적인 상황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세계의 밑바탕에 중고등학교와 대학 때 은사와 선배들이 얼마나 소중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금도 어린 시절 내가 그렸던 낙서들과 미술숙제를 거의 기억하고 있다. 천성적으로 그림이 좋아서 미술시간이 무조건 즐거웠다. 이후 숭문중고에 진학해 미술부 활동을 했는데 민중예술적 시문학을 추구하신 정희성 선생, 한국적 감성을 열정적으로 찾으신 이광성·오홍석 선생 등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분들에게서 민중미술을 느끼기는 했지만 한편 개인적으로 사회 투쟁이나 분노보다 올바른 역사관이 더 힘이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러나 그분들에게서 미술인으로서의 실용적 사고, 일제문화의 왜곡과 근대화로 소멸된 우리의 정서, 한국의 미에 대한 실질적 접근법을 배운 것은 나의 예술 인생에 큰 자산이다. 이는 나의 작품세계, 미술인으로서의 삶에 큰 영향을 주고 바탕이 되고 있다.” 또 하나 그의 예술세계 형성에 핵심 토양 역할을 한 것은 그가 살아 온 시대의 환경과 체험이다. 김씨가 어렸을 적에 살던 여의도는 비행기 활주로가 있었고, 섬 주변에는 개구리가 뛰어다니고, 근처 낮은 산들에서는 가재도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에는 경제 개발이라는 국가적 사명이 사회와 학교, 온 국민 정서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성장한 김아토는 당연히 사회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다. 그는 이러한 시대 속에서 대학생활을 하면서 그가 가야 할 예술의 목적지에 대한 많은 생각과 고뇌를 하게 된다. “당시 시대상황은 자유로운 사고가 막혀 있고 진실을 다루는 것이 매우 어려운 암흑기였다. 이 와중에 대학 생활을 통해 포스트모던의 미학 구조와 뉴미디어의 태동을 지켜봤다. 은사인 오숙희 교수는 고도사회 전환점인 우리나라에 나타나는 철학적 빈곤에 대한 문제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백남준의 미디어 작품을 보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당시 백남준의 작품이 한국인의 정서를 현대적 매체로 전환해 보여준 기념비적인 혁명이라고 느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다져진 김아토의 체험과 표현욕구는 미국에 오면서 자신만의 작품세계로 펼쳐진다. 그의 그림에는 그림자를 연상시키는 단순화된 사람의 모습, 콘크리트 벽과 중앙에 단 하나 외로이 그려져 있는 나무 등이 나타난다. 싸움을 하는 개(犬)를 그린 듯, 가시가 박혀 있는 목걸이를 한 날카로운 눈의 개가 자신의 ‘자화상’이라는 이름으로 그려진다. 그의 그림에는 우리가 이 미국에 와서 살면서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것들이 특별한 장식이 없이 직설적인 어법으로 서술돼 있다. 그렇다면 김아토는 이러한 그림으로 무엇을 그리는 것일까. 그가 지향하고 있는 세계는 바로 자신이 경험한 인간 실존의 문제, 냉엄한 삶의 세계를 감성적인 추상의 화면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그렸던 ‘이민자’ 연작 시리즈 등에 잘 나타나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유학이나 이민을 와서 살고 있는 작가 내면에 스며든 그 강한 실존의식이 그가 지닌 특유의 반추상주의 조형언어로 표현되고 있음이다. 김아토는 스스로 자신이 이러한 자신의 삶의 반영을 그림으로 드러내고 있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나의 그림은 경험과 가치관에서 시작되지만 사회를 담고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은 마음을 담고 있다. 작가는 종교인과 철학자의 사이에 있는 존재다. 벽에 있는 낙서 하나, 교회나 절에 붙어 있는 그림 한 장이 어쩌면 우리들의 과거와 현재를 바꾸는 힘이 있을지 모른다. 나는 살면서 나와 우리 공동체가 느끼고 그 바탕 안에 투영된 바를 진솔하게 표현하려 노력한다.” 김아토는 예술적 사유에서는 이러한 확고한 바탕을 갖고 있지만 기법적인 면에서 특별한 재료에 구애 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지향하고 있다. 그는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써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화면 위에 콘크리트 벽면과 같은 처리를 해서 그 위에 물감의 번짐을 이용한 표현도 하고 있다. 그는 이에 대해 “인위적이기 보다는 자연 현상에 가까운 결과물을 얻으려 한다. 이 과정에서 시간성도 고려한다. 동물과 자연을 많이 다루려 하고 이러한 소재에 인간의 숨결을 담고 의인화하려 노력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김아토는 이러한 자신의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내면의 자유, 인간의 자유를 지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언젠가 쓴 작업 노트를 통해 이렇게 자신의 내면에 담긴 실존적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숨결을 느낀다. 대상들이 뿜어내는. 동물이건 식물이건 돌멩이건. 이들은 의인화 되어 마치 나의 모습인 양 보인다. 혹은 남을 바라보기 위해서인 양. 나는 이민자를 상징하는 새를 그린다. 나는 그 새가 나와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대신해 주면서 화폭에 들어와 주기를 바랬다.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린다. 하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다. 나는 내 주변의 존재를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나와 관련된 모든 이들의 감정과 느낌을 표현한다. 그리고 나는 이런 그림을 그리면서 진실로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 박종원 기자 jwpark88@koreadaily.com

2011-03-14

[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 (117)] 정물화의 현대적 변주로 생명의 가치 추구

화가 박은정은 1963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홍익대 미대에서 회화를 전공해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한국 화단에 데뷔해 꾸준히 작품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현대미술의 메카인 뉴욕에서 전세계에서 모여든 작가들과 함께 작품활동을 하면서 기존 작품에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2009년 6월 뉴욕으로 왔다. 현재는 브루클린에 있는 덤보 아트스튜디에서 작품 제작에 몰입하고 있다. 최근 작품전으로는 지난해 1월 허친스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올 1월에도 헌팅턴 피티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피티갤러리 개인전은 생애 22번째 개인전이다. 또 올해 링컨센터 전시와 첼시 텐리갤러리를 작품전 등 뉴욕과 런던 등에서 계속해서 전시회를 가질 예정이다. 박씨가 그림을 시작하게 된 것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고 부실해 갖은 병치레와 사고로 자주 병원에서 지내면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박씨는 “병원에서 혼자 있으면서 외부세계에 직접 뛰어 들어 즐기질 못하기에 상상을 즐겼다. 창 밖에서 노는 친구들을 바라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며 살았는데 그런 삶 속에 유일한 기쁨은 그림 그리기였다”고 말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박씨는 다수의 미술상을 탔고, 이로 인해 자신감과 기쁨을 얻는 순간들이 많아지면서 미술가로서의 인생을 살겠다는 꿈을 굳히게 됐다. 그렇다고 박씨가 처음부터 자신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남에게 보여준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또 졸업해서도 작품을 꾸준히 했으나 부끄러움이 많아 전시 발표를 못하다가 어느 날 친구들의 강력한 권유로 그룹전에 참가한 뒤 화가는 그림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전시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전시할 때면 여전히 부끄럽기만 하다”고 털어 놓는다. 박씨는 정물화를 그린다. 좀 더 설명해서 말하자면 기존의 정물화에 현대적인 소재와 구성을 더해 현대적인 조형언어를 갖도록 만들어낸 현대적 의미의 정물화다. 그의 그림들은 먼저 정물을 소재로 일반 회화기법으로 그린 후에, 물이나 용액을 넣은 투명한 비닐 튜브 용기나 관(管)을 캔버스 표면에 감싸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 여러 가지 물을 담고 있는 튜브나 관을 통해 새롭게 보이게끔 하는 것이다. 바탕 그림에는 꽃과 과일 등을 포함해 다양한 소재가 그려진다. 이러한 바탕 그림은 그저 그 자체의 느낌으로 끝나지 않고 위에 설치해 놓은 투명한 비닐 튜브를 통해 빛으로 발산되고, 굴곡지고, 변화되면서 다양한 시각적 충격과 느낌을 준다. 박씨가 이러한 현대적 변주의 정물 그림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어린 시절 병원에서 자주 접한 의학 용기, 각종 색깔의 튜브를 통해 들여다 본 생명의 고귀함과 감동이다. “나는 살아 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 생명과 생존에 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춰 작업하고 있다. 나의 작품은 이미지보다 그림 위에 놓여진 오브제(튜브)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나에게는 시각적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 오브제의 의미가 더 중요하다. 그것은 나의 어린 시절, 병치레와 사고로 인한 병원생활중의 경험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링거 주사를 맞으며 보았던 투명한 병 속의 여러 약물들로 인해 내 몸이 회복되고 다시 삶을 되찾게 되는 것에 대한 감사. 그 신비로운 능력을 느끼면서 약물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됐고 지금 나는 나의 작품에 그 때 느끼고 간직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박씨의 작품에 대해서 미술평론가 고충환씨는 ‘오브제 회화, 정물화의 지평을 넘어’라는 작가론을 통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박은정의 화면은 정통적인 정물화에 대한 미술사적이고 인문학적인 맥락 속에서 읽힌다. 정물화의 전통을 자기화하면서 이를 현대적인 문법으로 각색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그림은 단순히 그림으로만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는 그림에다 사물을 도입했다는 점에선 일종의 오브제 회화로 범주화할 수 있으며, 평면이면서 동시에 입체를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선 일종의 저부조 회화로 볼 수도 있다. 그의 그림에서 튜브 관을 투과한 화면은 그 이미지가 굴절돼 보인다. 관이 가지고 있는 투명한 성질이나 두께, 그리고 그 속에 담겨진 물에 의해서 화면이 굴절돼 보이는 것이다. 마치 그 표면에 요철이 있는 간유리를 통해 사물을 보듯, 이미지의 실체가 모호해지면서 화면에다 특유의 후광을 부여한다. 소재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투명하고 가녀린 줄이 가로 지른 화면의 인상은 차양이나 발을 통해 자연을 음미했던 옛사람들의 미적 감수성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그림을 통해 박씨가 바라보는 지향점은 어디일까. 그가 그림을 통해 가고자 하는 곳은 어떤 모습일까. 박씨는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이렇게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지고의 미는 ‘걸림이 없는 순수’에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작업은 모든 생명이 깃든 것에, 존귀함을 위해, 헌신적인 지고의 순수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탐구하고 노래하는 것이다. 나 자신이나 다른 여러 작가들 모두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 가야 할까 걱정하고 괴로워한다. 현실 문제와 작업에 대한 열정 때문에. 거대하고 척박한 사회 속에서 존립에 대한 흔들림으로 고통스러워하는데, 그것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이다. 그러나 우리 작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말고 끝장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작가를 작품과 떼어놓을 때까지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해야 하므로.” 박종원 기자 jwpark88@koreadaily.com

2011-03-07

[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 (116)] 문학적 감성으로 인간의 내면세계 탐구한다…화가 김수경

화가 김수경은 197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 미국 미주리주에서 1년간 살다가 다시 한국에 가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1999년 가족과 함께 이민 왔다. 뉴욕시에 있는 FIT에서 그라픽디자인 전공해 학사 학위, 다시 파슨스디자인스쿨에서 일러스트레이션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김씨는 파슨스디자인스쿨 졸업 후 ‘타임 아웃(Time Out)’ 잡지사에서 웹사이트 디자이너로 일했고, 현재는 브루클린 덤보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회화와 일러스트레이션, 판화 작업을 하면서 디자인 일도 하고 있다. 김씨는 그 동안 뉴욕과 도쿄 등에서 개최된 각종 그룹전에 참가했고, 특히 2007년 싱가포르에 있는 IDN 잡지가 아시아의 떠 오르는 미술가들을 선정해 베를린에서 개최한 아시안아티스트 그룹전, 뉴욕 비영리단체 아트컨넥트라가 주최한 그룹전 등에 출품했다. 오는 4월에는 뉴저지주 파라무스에 있는 리버사이드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가질 예정이다. 김씨는 어려서부터 미술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채화를 배웠고, 이것이 지금까지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는 어렸을 때 외교관이나 심리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대학입시 준비를 할 때 홍익대 앞에 있는 친척 언니의 미술 스튜디오를 방문했다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멋있어 보여 갑자기 진로를 미술로 바꿨다. 김씨는 많은 독서량과 사색, 문학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의 그림은 서정적이고 회화적이다. 그의 그림에는 사람이 나오고, 산이 나오고, 물이 나온다. 동화적인 소재가 자유스러운 필치와 색채로 그려진다. 그의 그림에는 문학이 있고 시가 있다. 환상의 세계가 펼쳐지는 과정에서 스토리가 있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이 같은 문학적 서정과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은 언론인이었던 부친(김창욱 전 뉴욕중앙일보 사장)의 영향과 독서와 여행 등을 통해 얻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나는 책을 읽고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깨닫는 부분이 많다. 여행을 통해 내가 몰랐던 세계에 대해 알게 되고, 고생하고 직접 느끼면서 배우고 영감도 얻는다. 대학 때 배낭을 메고 유럽에 갔을 때 고호와 렘브란트의 그림을 직접 보고 ‘사람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느꼈다. 나는 그림을 시작해서 현재까지 혼자 습득해서 배운 것이 많다. 이 때문에 나만의 색깔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김씨는 이러한 독서와 경험을 바탕으로 초현실주의, 낭만주의 계통의 회화를 그린다. 그의 그림에 인물과 동물, 하늘과 나무가 그려져 있지만 전체적으로 늘 현실을 딛고 넘어서는 새로운 감각적인 세계를 드러낸다. 그 스스로 자신의 그림은 초현실주의와 낭만주의적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그림은 문학과 떨어지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시와 문장이 갖고 있는 서정성이 그의 그림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림이 갖고 있는 문학적인 요소를 깊이 파고 들면서 인간과 자연을 모습을 뛰어난 시적인 감수성으로 그려내고 있다. “나는 단어나 문장의 아름다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나 감정 등을 내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싶다. 그림 안에 보통 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내포된 의미가 있다. 내 그림은 보여지는 시 같은 작업이라고 말하고 싶다.” 김씨는 이러한 그림들을 통해 ‘인간’을 들여다 보고 있다. 그 스스로 “내 작업의 메시지는 인간성의 탐구에 있다”고 말할 정도다. 김씨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세상의 이야기를 하면서 무엇인가 보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 있는 여러 가지 인간상과 그들의 이야기를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싶다. 평소에 주위나 일어나는 일이나 장소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때그때 관심 있는 생각들을 이야기로 만들어 그림으로 옮긴다. 나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공간 사이의 관계를 관찰하고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때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시를 읽듯이 그림을 보고 해석해 각자의 느낌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그림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소설가 생 텍쥐베리가 준 것과 같은 감동을 주는 화가가 되고 싶다.” 박종원 기자 jwpark88@koreadaily.com

2011-02-28

[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114] "휴식이 있는 그림, 마음의 안식 주는 작품"…화가 신한종

화가 신한종씨는 1964년 한국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2004년 미국으로 유학, 맨해튼에 있는 인물화 전문 대학원 ‘뉴욕 아카데미 오브 아트’를 졸업했다. 현재는 맨해튼에 거주하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신씨는 2005년부터 현재까지 맨해튼에 있는 매디알리아 갤러리 등 여러 미국 갤러리의 전속 작가로서 스폰서를 받고 있고, 또 메디슨 갤러리와 메디슨 아카데미 대표를 맡고 있다. 신씨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가졌다. 이후 미국에 와서도 뉴욕뿐 아니라 런던 등 유럽 여러 곳에서도 개인전과 그룹전을 열었다. 또한 신씨는 한국에서는 한국인물화작가회 등에서 활동했고, 한국과 미국에서 현재까지 25년 이상 학생들에게 회화를 가르치고 있다. 현재 신씨의 작품이 소장돼 있는 곳은 매디알리아 갤러리, 뉴욕 아카데미, 메디슨 갤러리, 개인 소장가 등이다. 신씨가 미술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그림을 그리는 모친(여류화가 원연자씨)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되었고, 부친의 미술에 대한 관심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지원을 받고 있다. 모친인 원 작가는 국전 등에서 여러 차례 수상을 했고, 현재 작품 창작과 전시 등을 위해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신씨는 주로 유화 재료로 인물화, 정물화, 풍경화 등을 그리는데 있어서 회화가 갖고 있는 고전 기능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쉽게 말하면 서양 유럽의 근대 회화가 갖고 있는 재현기능에 충실하면서도 그 그림 속에 화가의 혼과 정신을 담는 그림이다. 신씨의 작품 중에는 유화 작품과 목탄을 재료로 사용한 드로잉 작품들이 많다. 또 유화에 사용하는 특별한 페인트와 오일 재료들, 또 부드럽게 표현되는 목탄 등이 신씨가 갖고 있는 뛰어난 회화적 능력과 어울려 더욱 강하면서도 감미로운 효과를 더해 준다. 신씨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과 정물은 깊이 있는 색감과 조화로운 구도 속에서 작가의 깊은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신씨는 진정한 창작이란, 과거 서양의 미술 양식을 그대로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들에 자신만의 감성과 철학을 이입 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최근 작품인 '진실인가 또는 거짓인가'라는 작품은 흰 천이 어떤 물체를 덮고 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보통 평소에는 알 수 없다가 어떤 내면 의식이 보여질 때야 비로소 그 모습을 알 수 있는 사람의 여러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은 보여지는 모습 보다는 그 안의 모습들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보는 이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자신에게 한 번씩 질문하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또 성서에 나오는 여러 스토리의 감동을 담은 그림이 있는 데 이 작품들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잔잔한 생각에 잠기게 합니다." 신씨는 이처럼 자신이 고전주의 양식의 전통 회화에 깊이 있게 빠져 든 이유를 이렇게 같이 말한다. "대학 시절과 졸업 후 현대 미술의 주류를 이루는 비구상 작업을 하면서 활동하던 중 좀 더 의미 있는 많은 표현을 그림으로 전달하고 싶어 인물화로 전향했습니다. 그 후 뉴욕 아카데미 오브 아트의 커리큘럼을 통해 페인팅과 드로잉 작업은 물론 조각과 판화 등으로 미술의 큰 줄기를 잡고 나니, 인물화뿐 아니라 다른 작업들도 더욱 깊이 있게 할 수 있게 됐습니다." 특히 여기서 신씨는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기본적인 능력인 테크닉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더욱 좋은 작품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회화적인 능력과 함께 자신만의 감성이 조화를 이룰 때 훌륭한 작품을 만들고,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화가가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훌륭한 테크닉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테크닉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진실하고 의미 있는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 예술가는 끊임없이 배우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 때는 제대로 된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거장이 되겠지요." 그러면서 신씨는 테크닉의 중요성과 함께 한편으로 자신의 작품이 너무 어렵기 보다는 편안한 그림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나는 휴식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물론 마음의 안식을 줄 수 있는 작품이란 쉽지 않은 일이며, 진실을 담은 그림을 표현하는 것 또한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복잡하고 혼돈스러운 현대 사회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고 찾아 갈 수 있도록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그림들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또한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에 언제나 감사 드립니다. 그것도 제가 가진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인정을 받으며,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림을 통해 제가 받은 많은 것을, 이제 다른 이들과 함께 더 많이 나누고, 좋은 작가들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도록 열심히 가르치고 이끌 것입니다." 박종원 기자 wpark88@koreadaily.com

2011-02-06

[뉴욕의 한인 미술가들] "바다는 생명·안식·자유의 공간"

작가 장진원씨는 1967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해 광주광역시에서 성장했다. 1996년 중앙대학교 대학원(한국화 전공)을 졸업하고, 2004년 미국에 와 뉴팔츠 뉴욕주립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 서울 관훈갤러리 개인전을 시작으로 그 동안 7번의 개인전과 수십 번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한국 동아미술제와 대한민국 미술대전, 뉴욕주 올바니 판화전 등에서 여러 상을 수상했고,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광주시청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장씨는 20대에 화단에 등단해 한국화 전통적인 재료를 이용한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했다. 한국화 재료를 사용했지만 표현방법에서는 서구적인 형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개념의 산수화를 그렸다. 장씨는 뉴팔츠에 있는 뉴욕주립대를 다니면서 새로운 예술, 새로운 표현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유학생활의 다소 고립된 상황에서 작가로서 자세를 다시 깊게 생각하게 되면서 한국에서 작업들이 예술 본연의 목적이 아닌 입신양명을 위한 도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후 나를 짓눌렸던 원인들을 하나하나 없애 나가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거의 처음으로 정신적 자유를 알게 되고, 또한 작업을 한다는 게 행복 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됐다. 이후 자유로운 영혼과 순수함을 가진 예술가 관점에서 내 삶에 집중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마음 속의 갈구가 작품 주제로 나타나게 됐다." 이러한 전환과정을 거치면서 장씨의 그림은 페인팅(드로잉), 인스톨레이션, 종이 부조 등으로 다양화된다. 표현되는 소재는 크게 범선과 해파리, 물고기가 주류를 이루는데 이러한 소재의 표현을 통해 상처 받은 영혼 치유에 관한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장씨가 만들고 그린 작품 대부분의 소재는 바다와 관련돼 있다. 이에 대해 장씨는 "내가 갖고 있는 바다에 대한 정신적 외상, 곧 물에 빠져 죽을뻔한 몇 번의 기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물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거의 필연적으로 바다나 물에 연관된 사물들을 화면이나 전시공간에 끌어들이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씨는 5년 전 대형 수족관에서 물이 가진 엄청난 예술적 에너지를 느끼는 체험을 하면서 바다라는 공간은 생명의 공간, 안식의 공간 그리고 자유의 공간으로 한 단계 올라 선다. 장씨는 이를 바탕으로 최근에는 물고기와 범선 등을 소재로 하는 다양한 표현주의적인 작품들을 통해 자신 의식을 영적인 체험과 치유의 상태로 끌어 올리고 있다. 장씨의 작품 중에 함선의 형태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설치 작품이 있다. 이는 영적 세상과 보이는 세상을 연결하는 매개체를 의미한다. 장씨는 "나의 작품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공포나 고뇌의 상태를 극복하려고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며 "이를 통해 인간에게 안식을 제공할 수 있는 명상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내 작품의 목적이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치열한 작품활동을 하면서 장씨는 한편으로 자신이 지향하는 예술의 본령을 이렇게 풀어 설명한다. “예술이 혹은 예술가가 이래야 한다라는 것을 정확히 정의하기는 쉽지가 않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나의 삶은 항상 물같이 멈춤이 없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정신을 가진 예술가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 추구를 통해 나의 예술은 끊임없는 신선함과 에너지 속에 있게 될 것이고 또 삶 역시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선함과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자유롭고 거리낌 없는 상태가 될 때 대중들 역시 나의 작품을 통해서 긍정적 에너지와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박종원 기자 jwpark88@koreadaily.com

2010-10-04

[뉴욕의 한인 미술가들-92] 끊임없이 진화하는 생명체 그려

스카이 김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미술 공부를 하다 미국으로 유학 와 1996년 뉴욕 프랫인스티튜트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뉴저지주 저지시티에 거주하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 동안 한국과 미국에서 7차례 개인전을 가졌고, 수십회의 크고 작은 그룹전에 참가했다. 오는 9월에 거버너스아일랜드에서 열리는 아트페어에 참가할 예정이다. 김씨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림 이외에는 다른 일을 생각해 본 적도 없을 정도로 운명적인 화가로 태어났다. 물론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가 잠깐 거주할 때 지독한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었다. 김씨는 “참 많이 힘들었지만 그 시기가 작품의 변화에 있어서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후 작업에만 집중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생활하는데 쏟는 시간과 에너지를 줄이자는 자신만의 새로운 철학을 갖게 됐다. 친구들도 덜 만나고 잠도 덜 자고 하면서 대신에 작업실에서 쓸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해 그림에 쏟아 넣는 것이다. “예전에 방향을 잃고 허송세월을 보냈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1분 1초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하루 24시간이 너무나도 짧게 느껴집니다. 이 때문에 일단 작업을 시작하면 쉬지 않고 꼬박 12시간에서 14시간 동안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김씨의 작품은 두루마리 시리즈(Scroll Series)가 많다. 그는 연필과 마커, 수채화 물감 등 누구나 사용하기 쉬운 간단한 도구를 이용해 긴 종이 위에 미묘한 시각적 착시 효과가 있는 이미지를 만든다. 길이가 10야드(30피트)나 되는 종이 두루마리가 벽에서 시작해서 바닥으로까지 깔리기 때문에 평면 작품이자 입체적인 설치 작품이 되기도 한다. 김씨는 이 위에 물과 피와 같은 것에서부터 인체의 생명의 일부를 상징하는 듯한 원형질과 신체 기관의 모습, 자궁과 세포 형상, 쌓이고 겹치는 인체 또는 우주 코스모스의 드러나지 않는 초시각 형태들이 강렬한 색상과 꿈틀대는 형상으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김씨가 이러한 독특한 형식의 작품에서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김씨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형태인 원은 제 작품에서 끊임 없이 진화하는 생명체를 상징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현미경으로 보면 그 돌의 구성체들이 무수히 살아 움직이면서 끊임 없이 진화를 계속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태아가 엄마의 뱃속에서 9달 동안 조용히 웅크리고 지내면서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준비하며 쉬지 않고 성장을 계속하는 이러한 우주적 생명 에너지가 제 작품의 중심을 이룹니다. ” 김씨가 이러한 생명 에너지를 표현의 중심에 끌고 나온 곳은 태어날 때 사망한 쌍둥이 자매에 대한 기억 또는 자의식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자의식은 자신의 작가노트에 문학적 표현으로 자세히 묘사돼 있다. 이를 보면 김씨는 자궁 속에서 함께 지냈던 쌍둥이 자매에 대한 생각과 인식이 자의식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이것이 그 자의식을 초극하는 한 과정으로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김씨는 이러한 내면적인 자신의 세계를 작업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그의 이러한 작업 태도는 종교를 공부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글 쓰는 작가가 한 자 한 자 글을 써나가듯이 나는 10야드 길이의 종이에 그 순간의 시간, 공간, 에너지와 감정을 기록합니다. 관객들이 제 작품 속에 있는 동그라미, 점, 선 하나하나를 눈으로 따라가면서 자신이 어디서부터 온 누구이며, 또 현재 자신의 모습이 진정한 자신인지 살폈으면 합니다. 또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심 때문에 인간의 삶과 생명이 가진 우주적 본질을 잃은 것은 아닌지 조용히 조명해 볼 기회를 갖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박종원 기자

2010-08-02

[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 (55)] 화가 클레어 강

클레어 강은 60대 초반으로, 서울에서 출생해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했다. 1960년대 미국에 유학 와 펜실베이니아미술아카데미, 카네기멜론대, 캐나다 노바스코티아미술학교 등에서 공부했다. 현재는 뉴욕주 웨스트체스터카운티에서 살면서 미국과 한국, 유럽 등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강씨의 작품세계 기반은 꽃꽂이 디자인이다. 유학생활을 하면서 꽃꽂이 디자인을 시작해 지난 30년 동안 대단한 집중력으로 이 분야에 몰두했고 현재는 브롱스에 있는 뉴욕시 식물원 플라워 디자인 디렉터를 맡을 정도로 미국에서 알아주는 꽃꽂이 디자이너가 됐다. 그 동안 미국 유수의 미디어에 최고의 플라워 디자이너로 여러 번 소개됐고, 올해 필라델피아 플라워 전시회에서 ‘희망의 창(Window of Hope)’ 작품으로 최고상 등 큰 상을 4개나 탔다. 그러나 강씨는 플라워 디자인을 넘어 회화와 조각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꽃은 신이 인간에 준 선물입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 꽃꽂이 작업을 한 뒤에 화려한 꽃이 며칠만 지나면 금방 시드는 것을 보고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어떻게 ‘꽃의 마음’과 ‘꽃이 준 감동’을 보존할까 많은 고민을 하다 이것을 평면과 조각 작품처럼 새롭게 구성하는 형식을 찾아냈습니다. 바로 서양미술의 꼴라쥬(collage) 기법처럼 감동의 실체를 작품에 직접 투입해 이를 회화와 설치작품처럼 구성해 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씨의 예술철학에 기반한 작품들은 섬유와 기존에 만들어진 조화, 구슬, 그물, 나뭇잎, 보자기, 버선, 색종이, 한국의 골무와 실패 등 다양한 소재로 만들어진다. 작품은 이러한 소재를 뛰어난 조형능력으로 자르고 붙이고 그린 평면작품도 있고, 유리용기 등에 넣은 3차원 작품도 있다. 작품들은 하나 같이 섬세한 표현과 뛰어난 구도를 갖고 있어 잔잔하면서도 오래 가는 감동을 준다. 특히 9·11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마음을 담은 ‘도시’ 시리즈와 여인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르네상스 우먼’ 시리즈에는 고아한 꽃의 아름다움과 작가가 세상사를 해석하는 창고적 미의식이 표현돼 있다. 강씨의 이러한 작품세계는 그가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작가로서 대단한 창조력과 추진력을 갖지 않으면 이러한 미지의 세계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그러나 강씨의 작품은 꽃의 아름다움과 새로운 형식의 개척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는 꽃의 아름다움과 함께 현실적인 발언, 민족적 미감을 미국과 세계에 알리려는 예술적 신념이 녹아 들어가 있다. 그윽한 색감으로 한국의 은근과 끈기를 담은 2006년작 ‘버선’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한국의 색감은 진정으로 아름답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과 형태가 버선과 보자기 등에 담겨 있습니다. 골무와 실패 보자기 등을 사용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작품을 통해 이런 한국의 아름다움과 한국인의 미감을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박종원 기자

2009-08-03

[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 (53) 화가 브라이언 레오

화가 브라이언 레오는 30대 초반으로 한인 어머니 이효선씨와 이탈리아인 아버지 세르지오 레오 사이에서 출생했다. 현재 로어 맨해튼에 있는 레오케스팅 갤러리 전속작가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레오는 미국과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일어났고 또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현실적인 주제를 그린다. 그의 그림에는 한국적인 상황과 현실을 담은 그림들도 많다. “어머니는 현재 뉴저지주에 살고 계신다.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고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한국 문화를 사랑하고 늘 관심을 갖고 있다. 한국의 문화와 정신, 그리고 현재 보여지는 현실은 내 그림의 중요한 관심사다. 국적은 혈통과 함께 사랑과 흠모로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몸과 마음이 모두 한국인이다.” 작가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김밥(2009년작)’ 등 한국의 현실을 담고 있는 작품들로 나타난다. 김밥은 북한과 남한의 모습을 서로 대비시킨 것으로 위의 북한 모습은 기아로 인한 참상과 독재체제, 밑의 남한 모습은 숭례문과 무덤으로 구성했다. 레오는 “남북 통일을 염원하는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이 같은 한국에 대한 관심은 김정일이 흡연하는 모습 등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레오의 그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 곧 미국의 치열한 현실도 그림에 담는다. 그의 그림에 9·11 참사의 실상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 서프라임모기지 사태 등이 녹아 들어가 있다. 그의 정신은 자유롭고 표현도 자유롭다. 그의 그림은 작가가 숨쉬고 사는 땅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의 그림은 온 세상 모든 것을 담을 듯 거대한 흡인력으로 세상사를 빨아 들여 풍자와 해학으로 소화해 내고 있다. “내 작품에는 개인사와 사회에 대한 발언은 물론 성적인 메시지까지도 반영돼 있다. 구글(google.com)과 허리케인 카트리나,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이용한 패러독스가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앞으로는 스타워즈에 나오는 복제군인은 물론 미래의 가정에서 쓰여질 애완 로봇도 그리고 싶다. 나는 이 같은 그림을 통해 인간 내면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다.” 주위에 대한 그의 관심과 이를 그림에 담는 노력과 능력은 특별히 존중돼야 하는 부분이다. 그가 갖고 있는 충만한 현실적 개방성과 함께 회화적 심도(深度)를 더한다면 아마도 그는 대단한 작가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박종원 기자

2009-06-29

[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52] 화가 최영욱 '도자기 곡선은 우리 인생길'

화가 최영욱씨는 40대 중반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미대와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고 작품활동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와 현재는 뉴저지주 테너플라이에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의 가인 갤러리와 김내현 갤러리, 뉴욕의 아트게이트 갤러리 등에서 10번이 넘는 개인전을 가졌고 70회 이상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대부분의 현대 작가들이 그러하듯 최씨는 구상과 추상, 격정과 정제, 방황과 진화의 세월을 거쳤고 현재는 한국의 전통 도자기인 달항아리 연작을 그리고 있다. 최씨의 그림은 단순하다. 두 개도 아닌 단 하나의 달항아리가 화면을 온통 가득히 채우고 있는 모습을 유화와 아크릴릭 등 여러 가지 매체를 사용해 그리고 또 그린다. 항아리의 형태는 둥글고 단순하지만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도자기 표면에 나 있는 균열과 색 바랜 것까지 하나 하나를 세필을 사용해 정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수도 없이 이어지는 그의 달 항아리 그림 시리즈는 뭔가 오랫동안 같은 것을 끊임없이 만드는 장인의 모습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보는 사람들에게 달 항아리는 그저 항아리일 수 있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더욱 확대된 의미가 있다. 최씨에게 달 항아리는 ‘연(緣·karma)’이라는 그림 제목이 말해주듯 인간 인연(因緣)을 미술적 감성으로 드러내고 있다. “도자기는 단순한 그릇이 아닙니다. 도자기는 우리의 인생사와 많이 닮았습니다. 도자기의 선은 우리의 인생 길과 같습니다. 갈라지고 이어지고,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른 듯 하면서도 하나로 어우러집니다. 나는 그 도자기 안에 나의 기억을 넣어주고 보는 사람은 기억을 더듬어 결국 우리는 만날 수 있습니다.” 최씨의 작품은 보기에는 달 항아리 하나 덩그렇게 그려져 있어서 보기 쉽고 이해하기 쉽다. 그저 달 항아리가 갖고 있는 넉넉한 모양과 푸근한 정서를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아마도 작가는 달 항아리를 그리면서 보는 사람들에게 그림이 가진 여유와 평화를 전달하고자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최씨의 달 항아리 그림은 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다. 작가는 이를 나름대로의 용어인 ‘기억(記憶)의 이미지화’라는 핵심어로 압축한다. 이를 풀어 말하자면 ‘작가가 갖고 있는 기억을 어떤 형태나 모양(달 항아리)으로 그려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억’은 무엇이고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과연 무엇인가. 그 이미지는 또한 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해지고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최씨는 깊은 예술적 사색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의 그림은 기억의 이미지화입니다. 기억은 이미지를 만들고 또한 이미지를 통해 표출됩니다. 그림을 그릴 때 나의 지각과 경험에 근거해 (어떤 그림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하는) 의도와 감정이 나오고 이 과정에서 소재나 재료, 색감을 선택한 뒤 구체적인 이미지를 표현합니다. 이렇게 그려진 달 항아리는 내 삶의 기억을 드러내는 이미지이고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달 항아리 그림은 내 삶의 이야기이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2009-06-21

[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 -51] 우주를 그리는 작가 '화가 백연희'

화가 백연희씨는 1945년 서울에서 출생해 이화여중, 서울예고, 서울미대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아트인스티튜트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한국을 오가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맨해튼 미드타운에 있는 스튜디오에 머물면서 작품 활동과 발표를 하고 있다. 백씨는 1975년 샌프란시스코 아트페스티벌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것을 시작으로 한국과 미국의 유수 화랑에서 30회가 넘는 개인전을 가졌고 그룹전은 그보다 훨씬 많다. 톱클래스 미술평론가들의 깊이 있는 글을 통해 한국의 공간(空間)과 미국의 아트위크(Art Week) 등 유수 매체에 소개됐고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새너제이미술관, 트라이튼미술관 등 수십곳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백씨가 화가가 된 것은 부모의 영향이 크다. 지질학자이며 철학자였던 부친은 사물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탐구성을, 성악가였던 모친은 풍부한 예술적 감수성을 물려줬다. 여기에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던 김병기 선생의 영향도 컸다. “학창시절 김 선생님의 화실에 나가 그림을 배웠는데 어느 날 그림 그리는 걸 묵묵히 보시더니 혼자 말처럼 ‘앞으로 그림 그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세월이 지나 이렇게 화가가 되긴 했는데 ‘과연 제대로 화가 노릇을 하고 있나’ 가끔씩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창조적 에너지와 작품에 임하는 열정, 깊이 단련된 조형능력 등만으로도 백씨는 대단히 뛰어난 화가다. 그가 그린 수백점의 작품들, 그리고 정신적 방황과 여정을 통해 구축한 독창성 있는 작품세계가 이를 실증적으로 말해준다. 백씨는 젊은 시절 인물과 기하학적 도형이 어우러지는 감각적인 추상작품, 신전의 기둥과 계단 등의 형태가 다양한 빛의 이미지와 결합되는 표현주의적 작품들을 쏟아내듯이 그렸다. 물론 이 때도 본 작품을 위해 연필이나 목탄으로 그린 드로잉 중에 모더니즘 시를 연상케 하는 문학적 분위기, 과감한 구성, 힘찬 필치를 드러내는 대단한 작품들이 많다. 그러나 백씨는 최근 별과 하늘, 성좌(별을 선으로 연결), 성운의 모습을 바탕으로 이 위에 선으로 묘사된 성당의 평면도, 지도의 등고선을 연상케 하는 곡선, 기하학적 문양을 조화시켜 거대한 우주 자연을 표현하는 우주도(宇宙圖)를 많이 그리고 있다. 우주도는 캔버스와 천, 알루미늄 판, 아크릴 판 등을 이용해 벽에 그리는 평면작품과 천장에 걸리는 설치작품, 바닥에 까는 바닥그림 등 형식적으로 다양한 변주로 펼쳐진다. 백씨의 우주도에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과 철학이 모두 녹아 들어가 있다. “10여년 전 병상에 계신 어머님께 광대한 자연을 보여드리고 싶어 천장화를 그렸습니다. 여기에는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우주는 어두움이 있어야 빛이 납니다. 이 우주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인 인간의 가치와 사랑,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박종원 기자

2009-06-14

[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50] 화가 주선옥- 인간, 자연, 그리고 추억

화가 주선옥(82)씨는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 정의여고를 졸업하고 1945년 광복 1년 뒤인 19세 때 남한으로 내려와 조양보육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에서 살다 1969년 아르헨티나로 이민 가서 10년 동안 살았고 이후 1979년 미국에 들어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봉제공장을 하다 은퇴했다. 현재는 뉴저지주 포트리에 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지난 2007년 대표작 50여점을 모아 뉴저지주 팰리세디움 대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주씨가 늦은 나이에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깝다. 연어가 태어난 곳을 찾아 회귀하는 것처럼 인생의 늦은 나이에 미술의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팔순을 넘긴 주씨가 그려 내 놓는 작품들은 한마디로 경이적이다. “평양에서 여고를 다니던 시절 늘 학교에서 뽑혀 모란봉에 가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고 이민하고 생활하느라 그림을 그리지 못했지만 늦게나마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이 정말 기쁩니다.” 주씨가 늦은 나이에 다시 그림을 그린 것도 그렇거니와 더 신비로운 것은 작품 수준이다. 미술은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그렸느냐에 따라 내용과 형식에서 광대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미술은 그리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 ‘감동’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지향한다. 주씨의 그림은 그의 나이나 이력을 떠나 그려진 그림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감동이다. 주씨가 남편 타계 후 다시 그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예수가 문 앞에 와서 문을 두드리는 장면 등 기독교적인 내용의 성화를 많이 그렸다. 그러던 것이 주위의 일상 생활과 자연 풍경, 정물, 인간, 추억 등을 담는 대담한 구도와 화려한 색상, 특유의 파격적인 필치를 구사하는 그림으로 심화하고 발전했다. 그의 그림에는 산과 골짜기, 초가집 풍경과 함께 뉴욕 인근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정감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꽃을 그린 정물화와 미국의 시골 풍경이 대단히 서정적인 필치로 나타나고 오래 전에 떠난 아르헨티나의 산하와 추억의 인물들이 한편의 시처럼 펼쳐진다. 주씨의 그림들은 자신의 주위에서 발견되는 사실적인 소재도 그렇거니와 형태와 색감, 구성 등에서 놀라울 정도의 감성적이고 분방한 표현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또 주씨의 그림에서는 북방 미술 특유의 대륙적 야성(野性)도 드러난다. 이것은 색채와 구도 등에서 인상주의나 사실주의 계통의 작품과 또 다른 강한 느낌을 준다. 화려하지만 결코 지나치지 않고, 형태가 파격적이지만 전체적으로 조화와 질서를 갖고 있다. 주씨가 나이를 뛰어넘어 이 같은 독자적인 표현세계를 쌓아 올릴 수 있었던 데는 그림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면 배도 안 고프고, 골치도 안 아픕니다. 어떤 때는 새벽 2시, 3시까지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을 그리면서는 깊은 평화와 기쁨을, 완성하면 큰 성취감을 느낍니다. 내가 좋아해서 그린 그림, 그 그림을 통해 많은 분들이 평화와 기쁨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박종원 기자

2009-06-07

[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 -49] 화가 앤드류 장

앤드루 장씨는 1954년 충주에서 출생해 홍익대 미술대학을 다니던 중 독일로 유학을 가 퀼른대학, 캐나다 알버타미술디자인대학을 거쳐 미국 SVA(스쿨오브비주얼아트)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는 뉴저지주 크레스킬에 살면서 SVA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미국과 한국에서 수십회의 개인전과 그룹전에 참가했고, 뉴욕타임스 북리뷰 등 미국 유수 신문과 잡지 등에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을 발표했고,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The World of Illustration)’ 등 2권의 책을 펴냈다. 장씨가 화가의 길을 걷게 된 데는 집안의 영향이 크다. 부친은 미술교사 겸 향토사학자였고 형은 만화가 지망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해 오리와 닭, 꽃 등 자연의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어릴 때부터 집안 전체가 미술과 가까운 분위기였습니다. 그림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홍익미대 디자인과에 들어간 뒤 더 넓은 곳에서 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해 학비가 없는 독일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장씨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휴머니즘’이라고 말한다. 유화와 수채화, 아크릴릭 등의 매체를 사용해 꽃과 새와 별 등 자연의 모습은 물론 식당 풍경, 여행할 때 봤던 모습과 감동 등을 대단히 감성적인 필치와 색감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여러 개의 그림으로 연결되는 연작시리즈와 글이 있는 그림, 서술이 있는 일러스트레이션이 특징이다. 한국의 오래된 사군자나 문인화처럼 그림과 시가 함께 있는 독특한 형식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장씨의 이러한 작품세계는 자신이 살고 있는 주위에서 쉽게 발견되는 풀턴수산시장 풍경, 포킵시에 있는 자신의 작은 별장에서 발견되는 새와 꽃 등 자연을 그린 작품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느꼈던 한국의 문화를 서술한 연작 시리즈에 다양한 얼굴로 담겨 있다. 그의 이러한 풍성한 감성과 자유스러운 표현, 오랜 숙련을 통해 이뤄진 기술적 수준 등과 함께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 현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미술가들 중 주위의 생활과 사회 현실을 그리는 현실주의(리얼리즘) 작가가 많지 않은 것이 큰 아쉬움이다. 이 때문에 한인들의 사회 활동이나 생활, 감성, 문화 등이 거의 미술로 흡수되지 못하고 있다. 많은 미술가들이 주위 사람과 사회가 아닌 미술의 형식과 자체적으로 고립된 사유에 집중하고 있어 미술이 역사와 단절돼 있다. 이에 대해 장씨는 ‘순수성’이라는 키워드로 해결책을 제시한다. “백남준 선생이 ‘예술은 사기다’고 말했는데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림은 순수한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과 감동을 순수하게 드러내는 것이 그림이지요. 미술가가 순수하면 주위에 있는 현실도 자연스럽게 그림 속에 들어올 수 있고 큰 감동으로 표현됩니다. 미술은 휴머니즘을 그리는 것이고, 그 휴머니즘 속에 주위 사람들의 생활과 현실이 모두 담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종원 기자

2009-06-01

[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 -48] 서양화가 김옥지

김옥지는 194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성장했고 지금은 플러싱에 거주하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서양화가다. 이화여중고를 거쳐 이화여대 생활미술과를 졸업했고 미국에 와서는 아트스튜던트리그와 FIT에서 공부했다. 그 동안 한국과 미국에서 30차례 가까운 개인전을 가졌고, 그룹전은 그보다 훨씬 많다. 김옥지가 그림을 그리게 된 데는 한국 서양화단의 원로인 김병기 선생(전 서울대 교수·현 캘리포니아 거주)의 영향이 크다. 김옥지는 그림에 대한 꿈과 동경을 갖고 있던 시기 김병기 선생의 아트리에를 자주 방문해 사숙했고, 실질적으로 작품 세계를 헤쳐 나가는 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뒤 한때 잘 나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다. 경제적으로도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고 명성을 누렸다. 그러나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도 늘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던 김옥지는 미국에 와서 자신의 마음과 희망을 계속해서 그림으로 그려냈다. 디자이너와 화가의 갈림길에 있던 김옥지는 1986년 뉴욕시 피닉스갤러리 전속작가가 되면서 단호히 화가의 길을 택했고, 이후 전적으로 화업에 매진하면서 자신의 미술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저의 인생에서 기독교 신앙은 진실로 중요합니다. 제가 가진 작은 재능을 이용해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림을 통해 다른 사람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이 제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림의 길을 택했습니다.” 김옥지는 많은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한국과 미국의 유명한 미술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는데, 대부분 ‘빛과 생명을 그리는 화가’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김옥지의 작품들은 빛이 하나의 광원에서 햇살처럼 퍼져 나오는 모습이나 생명의 원형질이 환희와 기쁨으로 꿈틀대는 것과 같은 힘차고 다이나믹한 형상을 담고 있다. 여기에 김옥지는 그림을 그릴 때 과거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활동하면서 다뤘던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훨씬 폭 넓은 표현과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빛과 생명의 의미를 추구하는’ 에너지를 느끼게 된다. 박종원 기자

2009-05-15

[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47] 한국화가 유영렬…생명 앞에서 겸손한 작가

유영렬은 60대 초반으로 뉴저지주 해링턴파크에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교육가 집안의 영향으로 수도여자사범대학(지금의 세종대학교) 미술과에 진학했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8년 미국에 왔고 바쁜 이민 생활 속에서도 맨해튼에 있는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판화와 서양화를 공부했다. 유영렬은 대학원 졸업 후 성수중학교를 시작으로 혜화여고와 수도여고 등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작품활동도 활발히 해 세종대학이 수여하는 미술교사상과 한국 화단의 중견 단체인 백양회(白陽會)가 주는 백양미술상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그 동안 개인전 한 차례와 한국과 미국, 프랑스 등에서 다수의 그룹전을 가졌다. 그가 미술을 하게 된 것은 개인적인 자질과 함께 집안의 영향이 크다. “언니와 오빠는 물론 가까운 친척들 중에 중·고등학교 교사와 의대 교수 등을 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미래에 선생님이 되겠다고 생각해 당연히 사범대학에 진학했고 중·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하고 공부했던 미술을 택하게 됐습니다.” 수도사대는 유영렬이 진학할 당시만 해도 미술에 관한 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당시 한국 화단의 거봉인 운보 김기창 선생이 재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김기창 선생의 스승으로 조선시대 마지막 어진화가가 불리는 이당 김은호 선생도 후학 양성을 위해 출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운보와 이당 선생이 학생들 그림을 지긋이 보시면서 그림 지도를 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갱지 위에 일필로 난초 잎을 치시면서 사군자를 가르치기도 하셨는데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유영렬의 작품은 운보와 이당의 영향을 받은 듯 채색과 화조, 사군자를 포함해 거의 대부분이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질서를 갖고 있다.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고 졸업할 당시에는 인물 채색 작품을 많이 하고 이후 새와 꽃을 그리는 화조화와 사군자, 중견작가로 활동할 때는 추상화 작품도 시도했다. 그의 작품들은 시기적으로, 형식적으로 여러 가지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충실한 뎃생과 묘사력, 오랜 수련을 통해 구축한 필법·채색법과 함께 작가가 가진 자연에 대한 사랑, 그림을 대하는 정직함 등을 바탕으로 자연주의 한국화의 높은 정신성과 아름다움을 펼쳐내고 있다. 박종원 기자

2009-05-10

[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 (46)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

고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이자 화가, 행위 예술가, 예술 사상가다.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6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64년 뉴욕에 정착해 유럽과 한국, 일본 등을 오가며 활동했다. 그의 지적인 영역은 미술 한 분야에만 그치지 않고 음악과 미학, 과학, 기술, 역사, 문명, 인간 등을 망라한다. 그는 위대한 예술가였고 또한 위대한 사상가였다. 백남준은 40년대 한국에서 태창방직을 운영하던 거부 백낙승의 아들로 종로구 서린동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경기중고를 다닐 때 음악 교사인 피아니스트 신재덕 선생(전 이화여대 음대학장)이 백남준의 타고난 재질을 발견하고 피아노와 작곡, 성악 등 음악의 다양한 분야를 가르쳤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피난, 도쿄에 정착한 백남준은 타고난 지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도쿄대학 미학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다. 이곳에서 백남준은 전후 일본 인문학의 대표적 지성인 다케우치 토시오 등 여러 명의 교수들에게 미학, 음악학, 작곡 등을 배우고 졸업 후 당시로서는 세계 현대 음악의 메카인 독일의 뮌헨대학 음악과 석사과정에 진학한다. 백남준은 이곳 뮌헨대학에서 전생의 분신으로까지 평가했던 전위음악 작곡가 존 케이지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이 때가 58년이고 백남준 예술에서는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 해다. 백남준은 존 케이지와 교류하고 한편으로 독일에서 발흥하던 현대음악, 아방가르드 미술 등을 접하면서 새로운 예술철학을 구축한다. 여기에는 존 케이지의 영향이 크다. 존 케이지의 철학은 심오하다. 억지로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서양음악은 기본적으로 음가(옥타브)와 박자(리듬)로 구성된다. 다시 말해 ‘높낮이를 가진 도레미…’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음악은 정해진 음가 이외에 무수한 음가의 영역을 포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도’와 ‘레’ 사이에 있는 ‘쉬는 순간’ 또는 ‘빈 영역’이 오히려 음악적으로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동양 불교에서 일찍이 갈파한 ‘삶과 죽음이 하나(生死一如)’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둘이 아니다(無二)’ 등의 위대한 지혜를 서양 음악으로 수용한 것이다. 서양 음악은 존 케이지로 인해 모든 음향과 순간(무의미) 모두를 음악(의미)으로 끌어들여 무한의 개방된 표현세계를 열었다. 백남준은 여기서 20세기 중반 인류문명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TV와 영화 등 영상매체는 물론 온갖 만물을 미술로 끌고 들어온다. 63년 백남준은 독일의 부퍼탈에서 TV 13대를 이용해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 전시를 연다. TV가 깨지고 망가지고 관객이 밟아야 영상이 보이게끔 만든 이 전시는 괴팍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정작 20세기 후반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비디오 아트를 연 위대한 첫 걸음이었다. 백남준은 이어 조셉 보이스를 만나면서 자신의 표현 영역을 몸을 이용한 행위예술로 확대시켰고 ‘플럭서스’ 전위그룹 활동을 거쳐 64년 뉴욕으로 이주한다. 백남준은 이후 미술가로서 절정의 시기를 보내는데 샬롯 무어맨과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공연, 84년 뉴욕과 파리를 연결하는 전지구적 비디오 아트인 ‘헬로우 미스터 오웰’, 1003개의 TV를 이용한 피라미드 형상의 엄청난 대작인 ‘다다익선’은 물론 우주인의 언어 같은 펜화, 어린이 유희 같은 크레용화, 일상품을 접합시키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반회화 반조각 작품, 조셉 보이스의 영혼을 기리는 진혼굿 등을 통해 뜨거운 예술혼을 연소시켰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해 당뇨병이 심해지더니 3년 전 맨해튼에서 길고 긴 잠에 들었다. 백남준. 그는 한국인으로 태어나 뛰어난 감성과 지성을 바탕으로 비디오 아트를 창시해 미술의 외연을 넓히는 한편 내적으로는 인간과 세계, 역사에 대한 통찰을 특별한 감수성으로 승화시켜 작품으로 표현, ‘인간 창조성의 무한함’을 드러낸 위대한 인간이었다. 박종원 기자

2009-04-27

[뉴욕의 한국인 미술가들] (45) 화가 김주상

화가 김주상은 1933년 서울에서 출생해 경기여고와 외국어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동양화와 서예, 수필 등을 발표하다 80년대 미국에 왔다. 현재 플러싱에서 살면서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자신의 아파트를 화실과 서재로 꾸미고 젊은이 못지 않은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 동안 한국과 미국에서 5번의 개인전을 가졌고, 수십 회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작품활동을 하면서도 미술가로서, 가정을 돌보는 여성으로, 이민자로서의 속 마음을 잘 드러내는 섬세한 필치로 ‘풀이면 마땅히 난초가 되고’ ‘나무일 바에야’ 등 2권의 수필집도 냈다.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90년대부터 ‘호연회(浩然會)’를 만들어 후학을 길렀다. 제자들과 함께 격년제로 개최하는 ‘호연전’이 올해로 5회째를 맞을 정도로 성장했다. 위대한 미술가들은 대부분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부모나 조상 중 누군가 미술을 업으로 삼아 선대의 공을 투입했거나, 현생에 스스로 미술을 좋아해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거나, 머리와 감성이 밝아 큰 노력과 장애 없이 스스로 미술의 이치를 깨우치는 경우 등이다. 종로에서 출생한 김주상은 어린 시절부터 서화(書畵)와 친숙한 환경에서 자랐다. 친조부는 근대 한국 서예와 전각의 태두로 불렸던 성제 김태석이고, 외삼촌은 한국 예술사진의 주춧돌을 놓은 사진작가 정해창이다. 김태석은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정부 출범에 맞춰 국새 제작을 맡을 정도로 전각이 뛰어났고, 특히 근대 한국 서화이론은 물론 서화수집과 감정 등에 일가를 이룬 위창 오세창과는 이종사촌간이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정치든 아니면 우동 장사 같은 사업이든 부모 자식 간에 피를 타고 흐르는 기운이 있기에 김주상은 날 때부터 기본적인 그릇은 타고 난 셈이다. 김주상은 한국전쟁 등 격변기에 경기여고를 졸업한 뒤 외국 유학을 위해 외국어대에 진학했으나 졸업 후 뿌리 깊은 유가(儒家)이자 독립운동가 이범석 장군을 배출한 집안에 시집을 가게 된다. 김주상은 명문가 집안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남편을 내조하면서 60년대부터 서화와 글짓기(수필)에 몰두했다. 김주상은 취암 이제서, 심당 김제인, 유산 민경갑 등에게 사사하면서 잠재된 미술적 재능을 끌어내기 시작했고 이어 70년대 아연회와 심우회 회원전 등 다수의 그룹전과 함께 1984년 첫 개인전을 가졌다. 김주상은 비상한 노력과 함께 타고난 지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놀랄 정도로 많은 양의 독서(讀書)와 사색(思索)을 통해 사군자와 수묵화, 화훼, 산수화(풍경)는 물론 한국화의 전통 재료를 이용한 서정성 짙은 반추상 그림 등을 샘물 솟듯이 창작해 냈다. 김주상의 수 많은 그림들 중 ‘뉴욕 정글’이라는 작품 하나만을 소개하는 것이 참으로 아쉽다. 김주상이 그린 묵화와 반추상화 등은 여류(女流) 특유의 섬세하고 단아함과 함께 자연과 생명에 대한 작가의 깊은 감성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타고난 재능과 함께 많은 독서로 다져진 서권기(書卷氣)까지 품고 있어 귀한 보물을 보는 듯 가슴을 뛰게 한다. 김주상은 이러한 자신의 작품세계를 평이한 말로 쉽게 설명한다. “인간은 큰 우주 안에서 살고 있는 하찮은 존재일 수 있습니다. 자연의 모래알만도 못한 것이 인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격(人格)을 갖고 그 자연의 이치에 순응할 수 있어 높은 가치를 가집니다. 그림은 바로 그 인간만이 가진 높은 인격과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마음을 담는 것입니다.” 박종원 기자

2009-04-19

[한국인 미술가들-44] 조각가 장수영…'희망 주는 작품 하고파'

조각가 장수영(57)은 뉴저지주 레오니아에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외가는 평안도, 친가는 충청도지만 부산에서 출생했고 서울로 와서 이화여중고와 서울대 미대, 대학원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고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동양화를 공부했다. 서울대 재학 시에는 원형질 형상의 힘찬 조각작품으로 한국 조각계에 널리 알려진 최만린 교수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회계사인 남편과 일찍 결혼해 미국에 왔고 미국 화단에 깊이 있는 미술이론과 미술사 연구로 이름 높았던 브루클린대학 제리 사무엘스(타계) 교수에게 배웠다. “젊은 시절에는 추상작품을 많이 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작업하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다 보면 필생의 역작이 나온다’는 은사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했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지금도 그 때의 열정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비록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보는 사람들이 희망을 느끼는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장수영의 최근 작품들은 인물이 많다. 주위 사람들과 모델, 또는 자신의 모습을 테라코타와 부조, 청동작품으로 만든다. 대부분 크지 않은 작품이지만 하나 같이 섬세한 터치(손맛)와 균형 잡힌 구성 등은 작가가 가진 뛰어난 조각적 능력을 드러낸다. 젊은 시절 지향했던 폭발적인 힘보다는 원숙한 표현, 한 단계 더 나아가서는 조각의 시적인 감수성을 드러낸다. 장수영은 이에 대해 “내 작품은 감춘 듯이 숨어 있는 것, 시적인 감수성을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장수영이 이처럼 조각을 통해 인간의 내면세계, 시적인 감수성, 조각 자체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중고등학교 때 가졌던 우주라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특별한 동경 때문이다. 장수영은 중고등학교 때 ‘스타 트렉(Star Trek)’ 영화를 감명 깊게 봤는데 이를 통해 인간과 우주, 존재 내면을 지향하고 탐구하는 욕구를 갖게 된다. 여기에 장수영은 젊은 시절 학구적인 노력을 통해 파스칼 등의 철학을 통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명제가 가진 인간 존재의 한계와 초월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하게 된다. 장수영의 최근 작품인 미국 여성을 모델로 한 ‘바비(Bobbie)’ 등 조각 작품은 물론 파스텔을 사용한 구성주의적인 회화 작품까지 그의 그림에는 하나 같이 작가가 추구하는 ‘우주와 인간 내면의 시적인 감수성’이 담겨 있다. 장수영은 이러한 자신의 예술 세계를 다음과 같은 담시(談詩) 메모를 통해 설명한다.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우주의 저편까지. 누구나 그리는 미지의 세계. 그 곳까지의 여행…. 우리는 그 곳도 품을 수 있습니다. 조각은 그런 것입니다. 우주의 생성과정과 변화, 그리고 미래까지 조각에 담겨 있습니다. 나의 조각에는 가 볼 수 없는 곳에 대한 향수를 현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조각입니다.” 박종원 기자

2009-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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